(초록우물가편지 40호) - 리빙스턴의 생애
2016년01월30일 17시25분
데이비드 리빙스턴
(David Livingstone)
1813년,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스코틀랜드의 가난하지만
경건한 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는 10대 때 회심하고,
의료선교사로 중국에 가고자 하여
방직공장에서 14시간의 중노동을
하면서 학업을 쉬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27세에 신학과
의학 공부를 마치고 선교사로
갈 준비를 끝낼 수 있었다.
아편 전쟁으로 발전된 중국과
영국간의 분쟁으로, 리빙스턴은
런던선교회를 통해 중국대신
서인도제도로 파송될 계획이었다.
그러는 와중 베테랑 아프리카 선교사인
로버트 모팻을 만나 1840년 12월 아프리카로 떠났다.
그는 곧 아프리카에 흠뻑 젖었다.
그러나 선교사역을 하면서 보니,
원주민들에게 지도력도 행사하지 못하는
선교사들의 집중 거주 현상이나 심각한
선교사들간의 불화로 큰 실망을 하였다.
리빙스턴은 견습 선교사로 쿠르만 지역에
2년 반을 머무르면서 1년 이상은 탐험을
위해 선교 기지를 떠나 있었다. 그의 이러한
“개척자적인 생활”은 일생 동안 계속되었다.
1845년 쿠루만에서 결혼한 리빙스턴 부부는
7년 정도 반 유목민 생활을 했다.
아내 메리와 아이들은 때때로 집에 머물기도 했고,
리빙스턴과 함께 여러 지역을 헤매는 방랑생활도 했다.
리빙스턴은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아프리카 탐험을 계속 한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1852년 케이프타운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영국으로 떠나보냈다.
2차례의 영국방문 외에는 대부분
아프리카 탐험에서 외롭게 지내야만 했다.
가족들이 떠난 후 리빙스턴은
전에 없던 성공의 시간들을 가졌다.
그의 최초이자 최대의 탐험은 잠베지 강을
따라 아프리카 대륙을 횡단한 것이었다.
두 번째 탐험은 잠베지 강이 항해하기에
부적합함을 밝히는 정도였고 이에 실망한 그는
셔 강과 니아자 호수를 탐험했다.
1865년 나일 강의 근원을 밝히기 위한
그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탐험이 시작되었다.
비록 나일 강의 근원은 밝혀 내지 못했지만,
그는 주위 환경 및 아프리카인들과 한층 더
친밀해 질 수 있었고, 그가 개척한 길들은
선교사들을 포함한 유럽인들에게 유용한
이동 통로로 사용될 수 있었다.
1873년 5월 1일 리빙스턴은
그의 침대 옆에서 기도하는 자세로 숨져
그의 하인에게 발견되었다.
아프리카인들은 그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의 심장을 꺼내 므푼두 나무 밑에 묻고
그의 시체는 미이라로 만들어
2,400 Km가 넘는 해안까지 운반하였다.
그리고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국장으로 장례를 치루었다.
이로서 한 위대한 선교사의 생애가 마감된 것이다.
-10년 전에 <선교한국> 자료 -